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경래의 난 (문단 편집) === 전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MFiG3Mo22aE)]}}} || || MBC 드라마 [[상도(드라마)|상도]] 중에서 || 홍경래의 난은 1812년 1월 31일(1811년 음력 12월 18일)부터 1812년 5월 29일(음력 4월 19일)까지 5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홍경래 난의 지도층에는 총지휘관인 대원수를 맡은 '''[[홍경래]]''', 부원수로 불린 '''김사용''', 광산을 경영하며 농민군 조직을 담당한 '''우군칙''', 이념 지도를 담당한 '''김창시''', 대상인으로서 물자 조달을 맡은 '''이희저''' 등이 있었다. 우군칙은 서자 출신으로 풍수와 점에 능했으며 학식도 높았고, 이희저는 역졸이었으나 상인이 되어 가재를 불린 가산에서 이름난 대부호였으며, 김창시는 사회 비판적 시각을 지닌 진사 출신의 문장가이자 재예가였다. 이들은 가산군 동북면 다복동(현 [[박천군]] 청룡면 인덕리 다복동)을 근거지로 삼아 광산 노동자 모집을 구실로 군사를 모아 훈련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힘을 잘 쓰는 역사(力士)들인 홍총각[* 洪總角. 또는 홍봉의(洪鳳儀), 홍이팔(洪二八)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홍총각은 말 그대로 [[총각]]의 음차이고, 홍봉의는 나중에 가져다 붙인 이름이 아닐까 추정된다.], 양시위, 김운용, 이제초 등도 가담하였다. [* 이중에서 [[양반]] 출신은 몰락 양반으로 추정되는 이제초 1명으로, 나머지는 모두 농민 출신이다.] 조선시대에 완전히 하급 무관 양성소 취급을 했던 서북 출신답게 홍경래, 김사용 등 지도부는 상당히 전투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심지어 모사로 취급받는 우군칙마저 칼을 빼드는 모습이 기록에 남아있다. 지도부에서 완전한 문관은 진사 출신인 김창시 정도. 여기에 더해서 역사 출신들은 농민층과의 연결고리로서도 그리고 일선 지휘관으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그야말로 서북 지방민들은 [[전투민족]]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아래는 홍경래의 난 당시의 격문으로 내신, [[수능]]을 불문하고 홍경래의 난을 문제로 낼 때 단골로 발췌 및 요약되어 나오는 사료 중 하나이다. 그만큼 이들의 봉기 의도가 잘 드러나 있으며, 그 한계도 잘 드러나 있는 내용이다. [[평안도]] 지역 차별만 내세워 스스로를 지역 고립시켜 지역에 국한된 반란에 불과했다는 것 등등. 이것은 홍경래가 이 격문을 평안도 전역에만 보냈다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평서 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평안도|관서]]의 부로자제(父老子弟)와 공사천민(公私賤民)들은 모두 이 격문을 들으시라. 무릇 관서는 [[기자(중국)|기자]]와 [[단군]] 시조의 옛터로서 벼슬아치가 많이 나오고 급제하고 문물이 발전한 곳이다. 저 [[임진왜란]]에 있어서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공이 있으며, 또한 [[정묘호란]]에는 양무공 [[정봉수]](용골 산성에서 분전했던 의병장)가 충성을 능히 바칠 수 있었다. 돈암 선우협[*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당대에는 상당히 명성이 높았다. [[인조]] 대에는 [[성균관]] 사업(정 4품)에 제수되었고 상당히 후대인 [[고종황제|고종]] 대에 이조 판서로 추증(1883년)되기도 했다.]의 학식과 월포 홍경우(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의 재주가 또한 이곳 서도에서 나왔다.[br][br]그러나 조정에서는 서토를 버림이 분토(糞土)와 다름없다. 심지어 권문의 [[노비]]들도 서토의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이라 일컫는다. 서토에 있는 자 어찌 억울하고 원통치 않은 자 있겠는가. 막상 급한 일에 당하여서는 반드시 서토의 힘에 의존하고 또한 과거 시험에 당하여서는 서토의 글을 빌었으니 400년 동안 서토의 사람이 조정을 버린 적이 있는가.[br][br]지금 [[순조|나이 어린 임금]]이 위에 있어서 권신들의 간악한 짓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김조순|김모]], 박모(박종경)의 무리[* 당시 외척으로 [[안동 김씨]] 급은 아니지만 권세가 셌던 [[반남 박씨]]들을 말한다.]가 국가의 권력을 제멋대로 하니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려 [[겨울]] [[번개]]와 [[지진]]이 일어나고 재앙별[* [[혜성]]을 가리키는데, 실제로 난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807년에 [[혜성]]이 나타났다는 관측 기록이 자주 보인다.]과 바람과 우박이 없는 해가 없으니 이 때문에 큰 흉년이 거듭 이르고 굶어 부황든 무리가 길에 널려 늙은이와 어린이가 구렁에 빠져서 산 사람이 거의 죽음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오늘 [[정도령|세상을 구제할 성인]]이 청북 선천 검산의 일월봉 아래 군왕포 위 가야동 홍의도에서 탄생하셨다. 나면서 신령함이 있었고 5살 때에 신승을 따라 중국에 들어갔으며 성장하여서는 강계 사군의 여연에 머무르기 5년에 [[명나라|황명]](皇明)의 세신 유족을 거느리게 되었으며 철기 10만으로 부정부패를 숙청할 뜻을 가지셨다. 그러나 이곳 관서 땅은 성인께서 나신 고향이므로 차마 밟아 무찌를 수가 없어서 먼저 관서의 호걸들로 병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구하도록 하였으니[* [[정감록]] 사상을 이용한 것으로, 홍경래는 정시수 또는 정제민이라는 정씨 성을 가진 진인의 명을 받아 난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정진인이 10만의 무리를 이끌고 조선 따위는 그냥 밟아버릴 수 있지만, [[나는 관대하다|자비로우신]] 분이라 대신 대리로 자신(홍경래)이 나섰다. 그리고 성리학적 명분론을 이용하기 위해 명나라 유민이 함께 한다는 주장도 곁들였다.] 의로운 깃발이 이르는 곳에 소생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br][br]이제 격문을 띄워 먼저 각 주, 군, 현의 고을원들에게 보내니 절대 동요치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만약 어리석게도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철기 5,000[* 당연히 실제 반군의 수와 질을 뻥튀기한 과장이다. 그냥 5,000명도 몰래 양성하기엔 대단한 규모인데, 철기(鐵騎)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으로 밟아 무찔러 남기지 않으리니 마땅히 명령을 따라서 거행함이 좋으리라. 위 격문을 [[안주목|안주]]병사, 우후목사와 [[숙천]]부사, [[순안구역|순안]]현령, [[평안도|평안]]감사, 중군, 서윤과 [[강서군|강서]]현령, [[룡강군|용강]]현령, [[남포시|삼화]]부사, [[강서군|함종]]부사, [[증산군|증산]]현령, [[평원군(평안남도)|영유]]현령에게 내리노라. 대원수 그렇게 추종자들을 모으며 '''10년'''에 걸쳐 '''들키지 않고''' 거점과 물자, 병력 등 만반의 준비를 마친 이들은 마침내 1,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봉기하여 불과 열흘 만에 [[청천강]] 이북의 가산, [[박천군|박천]], [[정주시|정주]], [[태천군|태천]], [[곽산군|곽산]], [[선천군|선천]], [[철산군|철산]], 남창, [[용천군|용천]] 등을 장악하였다. 이는 홍경래의 난이 보통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일반적인 농민 봉기와는 계획적인 반란이어서 크게 다르다는 점을 잘 보여주며, 치밀한 계획하에 정부 전복의 목적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워낙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기습이었던 데다 부정부패로 만연하던 지방정부엔 난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홍경래 측에게 금전으로 포섭되거나 역성혁명에 찬동하여 곳곳에 내통한 아전들이 있었다. 내통한 아전들에 의해 반란군이 오자마자 관아 문이 활짝 열리고 반란군이 들이닥쳤기에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항복하거나 붙잡혔고, 살기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반란군에 참여한 군수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김삿갓의 할아버지인 선천부사 김익순이 있다. 다만 가산군수 정시만은 아전들의 내통으로 문이 열려 저항하다 붙잡힌 뒤 죽기 싫으면 병부를 내놓으라는 반군의 위협에도 거부했다. 그 결과 반군에게 참수당했고 정시의 아버지도 아들의 시체훼손을 막기 위해 몸으로 막다가 흥분한 반군에 의해 같이 죽었다. 정시 부자의 시신은 정시를 수청들던 관기 최연홍(崔蓮紅, 1785~1846)이 반군 몰래 빼돌려 장례를 치렀다. 좀 어처구니없는 사실이지만 정시 이 한 명만이 반군에 맞선 유일한 수령이었는데, 당시에는 매관매직이 성행하던 시기였던지라 수령의 자질이 부족한 부패한 인물들이 수령 자리에 대거 앉아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점령된 8고을 중 5고을의 수령은 냅다 튀고 2고을의 수령은 자발적으로 항복했다. 그 때문에 정시는 반란 진압후 그 충직함을 높게 사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리고 반란군에 항복했을 뿐만 아니라 합류까지 한 김익순은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고 주모자들이 처형되자 태세전환하여 반군 수령의 잘린 목을 얻어서 자기가 목을 베었다고 상부에 거짓말까지 했음에도, 본인의 목만 달아나는 선에서 끝났다. 이는 조정에서도 자기 실책들이 있어서 그런지 당시 현장에서 책임을 지지 못한 수령들의 처벌에 관대한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수령들도 반란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극적으로 탈출하거나 진압군에 합류해 공을 세우는 식으로 벌을 받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런 난의 파급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홍경래가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로서 본대를 지휘하여 [[안주목]] 방면으로 진격하고, 김사용은 부원수로서 [[의주부]] 방면을 공략하였으며, 우군칙이 총참모, 김창시가 참모, 이제초는 북진군 선봉장, 홍총각은 남진군 선봉장, 이희저는 도총(都摠)을 맡았다. 결약을 맺어 서명한 인원에서 자의가 아니었던 자들을 제외하면 봉기 당시 군사 지휘자와 주요 내응자는 약 60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000명 정도의 봉기군 중 대다수인 일반 군졸은 상인들이 [[운산군|운산]]의 금광에서 일할 [[광부]]들을 구한다는 구실로 임금을 주어 끌어들인 인물들로서, 대개 가산·박천 지역의 땅 없는 농민이나 임금 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 봉기군 선봉대를 맡은 홍총각은 단숨에 가산·[[박천군|박천]]·[[태천군|태천]]을 별다른 저항 없이 즉시 점령하였고, 북진군도 [[곽산군|곽산]]·[[정주시|정주]]를 점령한 후 어려움 없이 [[선천군|선천]]·[[철산군|철산]]을 거쳐 이듬해 1월 3일에는 [[용천군|용천]]을 점령함으로써 평안도 서북지역의 중심지인 [[의주부]]를 위협하였다. 점령한 읍에는 해당 지역의 토호·관속을 유진장(留陣將)으로 임명하여 수령을 대신하게 하였고, 기존의 행정 체계와 관속을 이용하여 군졸을 징발하고 군량·군비를 조달하였다. 그래서 홍경래 군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서 한때는 진짜로 격문에 나온 5,000여명에 육박하게 된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반란이 진행된 이유는, 향임들과 상인 등 여러 세력들이 조정의 북방지방에 대한 무관심과 차별 때문에 홍경래의 난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란이 일어나자마자 성문을 내부에서 열어주는 등 적극적으로 호응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관군이 다수 주둔한 [[의주부|의주]]나 [[안주목|안주]] 같은 주요 지역은 점령하지 못했는데, 안주는 전략젹으로 중요한 국방상 요충지로 원래부터 이런 곳은 일반 고을처럼 허술하게 관리되는 지역이 아닌지라,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 내응했다고 해서 성이 넘어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반란군이 승리할 가망이 없다고 내다보거나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임상옥]]을 비롯한 거상들이 막대한 후원금을 기부하여 정부 편인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조정에서 파견한 양서순무사 이요헌, 감진사 [[정만석]] 등이 이끄는 관군이 북상한다. 게다가 봉기군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봉기군 간 의견 대립으로 내분이 일어나 홍경래를 살해하려는 세력들이 발각되어 처형된 것이다. 당시 평안도의 주요 고을인 [[안주시|안주]]와 [[영변군|영변]] 중 어디를 먼저 공격할 것인지 향후 공격 방향을 논하고 있었는데 안주 병영의 집사였던 김대린은 (자기가 잘 아는 곳이라 그런지) 일단 안주부터 재빨리 쳐들어가자고 주장했지만, 홍경래는 모사인 우군칙의 조언에 따라 김대린의 의견을 묵살하고 우선 영변을 공격한 후 그 다음에 안주를 칠 것을 결정했다. 자기 의견이 무시되자 김대린은 미래가 없다고 판단했고 이인배와 모의하여 배신하고는 홍경래를 암습했다. 물론 암습은 이들을 수상하게 여긴 우군칙의 대응으로 김대린이 현장에서 살해되고 이인배가 자살하면서 실패했지만, 이 암습으로 인해 지도자인 홍경래가 칼에 맞아 부상당한 결과 봉기군은 전 군이 멈춰버렸다. 때문에 봉기군은 다시 군사를 정비하느라 영변이나 안주 중 어느 한 곳에 병력을 집중할 수 없는 어려움에 빠졌고 시간을 지체했다. 이런 틈을 관군이 그냥 넘길 리 없었고, 전열을 정비하는 통에 제대로 된 편제를 갖추지 못한 채 관군과 격돌한 홍경래 군은 12월 29일 안주성 공격을 앞두고 [[박천군|박천]], 송림 전투에서 관군에게 참패하여 [[정주시|정주성]]으로 퇴각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부원수 김사용이 지휘하는 북진군 역시 [[의주부|의주]]의 김견신(金見信), 허항(許沆)이 이끄는 의주 민병대의 반격을 받은데다 송림 전투에서 관군이 승리한 소식마저 날아들면서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또한 송림 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진격해 온 함종부사 윤욱렬의 관군에 의해 북진군 선봉장 이제초가 [[곽산군|곽산]] 사송평(四松坪)에서 패전과 함께 참수됐다[* 패배한 뒤에 붙잡혔다. 사후엔 목이 효수됐다.]. 이리하여 그전까지 승전으로 병력이 2천~3천 명에 이르던 북진군은 사실상 궤멸되고 말았다. 결국 봉기군의 주요 인물들은 남은 병력을 해산하고 [[정주시|정주성]]으로 들어갔다. 반란군이 승리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붕괴된 이유는 여러 목적을 가진 다양한 집단이 명확한 한 가지 목표를 위해 결집한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반란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잘 되면 승승장구하지만, 뭔가 일이 안 좋게 돌아가기 시작하면 서로 발을 빼려 하기 때문에 한 방에 붕괴되기 딱 좋다. 실제로 전세가 관군한테 기울기 시작하자 향임층과 상인층이 먼저 발을 뺐고, 나중에는 의병까지 조직하여 되려 관군에 가담해 홍경래 군을 공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